[스크랩] 해방후 조선은행권

2010. 3. 18. 19:45화폐이야기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終轉)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쁘을 가져다 주었나, 곧 외세에 의하여남과 북으로 국토의 분단을 가져왔다. 1945년 8월 15일 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군정 및 과도 정부를 통하여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일본 경제와의 급격한 단절, 국토의 양단으로 인한 생산시설 및 지하 자원의 북한 편재등으로 말미암은 생산 위축과 산업구조의 불균형 심화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일본인에 의한 고의적 화폐 남발및 적자재정 등으로 인하여 누적되기 시작한 악성 인플레이션 등이 한국 경제의 재건과 발전을 암담하게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생산위축과 해외 귀환 동포의 격증 등으로 유발된 실업자의 증가. 사상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등이 중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여건하에 해방직후의 한국경제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그 재건과 발전이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1945년 해방후에도 군정법령에 의하여 조선은행법이 존속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선은행권도 계속 유통되었다. 조선은행권은 해방후의 급격한 통화 팽창으로 중심권종이 저액권으로부터 100원권으로 곧 이행되었으며,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된 은행권이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에 을(乙) 100원권이 최초로 발행되었고, 뒤이어 10월 20일에는 을(乙) 1원권, 12월 10일에는 병(丙)100원권과 을(乙) 10원권이 각각 발행되어 그후 모든 은행권 인쇄는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가 전담하였다.
을(乙) 백원권 1945.8.15
을(乙) 일원권 1945.10.20
병(丙) 백원권 1945.12.10
을(乙) 십원권 1945.12.10
은행 내각인쇄국에서 인쇄하던 조선은행권은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일본에서 제조할 여건이 되지 못하여 광복 직전부터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은행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100원권 21억원, 1,000원권 70억원 합계 91억원을 조선서적인쇄 주식회사에서 인쇄하였는데, 제조된 은행권은 "옵셋" 인쇄로서 전쟁말기의 물자부족사태로 인하여 지폐전용지가 사용되지 못하고 서울시내에서 구입된 모조지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광복후 일본의 전신 인출금 및 귀국비용 등으로 21 억원을 100원권만으로는 도저히 화폐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당시 일인들은 1,000원권 발행을 획책하였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화폐의 증발을 우려하여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일인들은 해방전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사용하던 100원권 원판을 가져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근택(近澤)인쇄소에서 8월 하순부터 9월초까지 약 15일간 조선은행권을 제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행권 을(乙) 백원권은 조선서적 인쇄주식회사와 근택인쇄소에서 제조된 것으로서 광복과 더불어 발행된 것이다.
1946년도에 들어서는 군정청 대상금의 방출이 본격화되고 그해 7월부터는 농산물 공출제도의 부활에 따른 양곡수매자금의 방출 등으로 7월말 화폐발행고는 현저한 증가추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더우기 공공요금의 대폭적 인상 등 으로 화폐는 계속 증가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해 5월 6일 병(丙) 십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행한 조선은행권은 일제시대의 도안 그대로 인쇄된 것이므로 은행권에서의 일본색 제거를 목적으로 종래 일본정부 휘장인 오동문장을 무궁화로 도안을 변경하여 7월 1일 정(丁) 백원권, 10월 10일에는 정(丁) 십원권을 발행하였으며, 이듬해인 47년 6월 3일에는 무(戊) 백원권을 발행함으로써 은행권의 일부쇄신을 가져왔다.
병(丙) 십원권 1946.5.6
정(丁) 백원권 1946.7.1
정(丁) 십원권 1946.10.10
무(戊) 백원권 1947.6.3
근택 인쇄소에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일본인들이 철수당시 은행권 인쇄판의 관리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당시 평판과장으로 있던 김모씨가 보관 중이던 100원권 징크판으로 조선 공산당이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 상순까지 6 차에 걸쳐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남발하였다.
이것이 당시 사회를 시끄럽게 하였던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인데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청은 남한내에서의 공산당의 활동을 불법화하였다

6.25사변중 공산군은 침범지역내에서 불법 남발한 지폐를 강제 유통시킴은 물론 공작 자금으로 사용 함으로서 경제질서의 파괴를 획책하였다. 정부는 피침지역에서 불법남발한 적성 통화(敵性 通貨)의 유통을 막고 경제 교란 행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1950년 8월 28일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제 1 차 통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1953년 1월 16일 제1차 통화조치가 완결되는 기간중인 1951년 10월 한국조폐공사법의 발효와 더불어 1952년 10월 신 1,000원권과 500원권을 인쇄하게 됨으로서 조폐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어 그후부터는 은행권 인쇄를 모두 한국조폐공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백원권 1950.7.22
천원권 1950.7.22
오백원권 1952.10.10
신 천원권 1952.10.10

전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지출과 생산활동의 위축, 통화의 대외가치 폭락으로 정상적인 무역 불균형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금융, 생산활동을 안정된 통화의 터전에 올려 놓기 위하여 정부는 1953년 2월 원화에서 환화로 개칭 100대 1의 평가절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제2차 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미국 연방 인쇄국에서 제조된 이 은행권은 평판 인쇄된 것이었으나 광복후 이 당시까지 발행된 어떤 은행권보다 고급종이를 사용한 뛰어난 화폐였다. 즉 형광물질을 넣어 자외선을 비추면 바탕이나 번호 색상이 바뀌며, 색사(色絲)를 넣어 위조가 어렵게 특수 제조된 것이었다.
십환권 1953.2.17
백환권 1953.2.17
천환권 1953.2.17
일환권 1953.2.17
오환권 1953.2.17

한국은행은 1953년 통화개혁시 미국에서 제조반입하여 발행한 은행권을 국내 제조권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1953년 3월 17일에 신 십환권, 같은 해 1953년 12월 18일 신 백환권을 각각 발행하였다. 발행초기에는 신 십환권및 신 백환권 모두 황색 조폐지를 사용하여 발행하였으나 신 십환권은 1953년 12월 15일 부터 신 백환권은 이듬해 2월 1일부터 각각 백색 용지로 바꾸어 발행하였다.
신 십환권(황색지) 1953.3.17
신 백환권(황색지) 1953.12.18
신 십환권(백색지) 1953.12.15
신 백환권(백색지) 1954.2.1

1956년 3월 새로운 액면의 은행권 발행이 이루어져 도안을 약간 변경한 오백환권을 발행하였다. 1957년 3월에는 신 천환권을 발행하므로서 소액 은행권 오환권 및 일환권을 제외하고는 미국제조 은행권을 모두 국내 제조권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1953년 2차 통화조치에 의해 환 은행권이 발행된 이후 1958년까지 발행된 신종 은행권은 9 권종에 달하였으며 특이한것은 이중 오십환권 및 신 십환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을 앞면 도안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오백환권 1956.3.26
(외산용지) 신 천환권 1957.3.26
(국산용지) 신 천환권 1957.3.26
개 백환권 1957.3.26
신 오백환권 1958.8.15
오십환권 1958.8.15

1960년 4.19혁명으로 경제의 안정성장을 이룩하기 위한 제반 경제현실화 정책이 실시되자 한국은행은 새로운 경제질서확립을 상징하 는 뜻에서 새로운 도안의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먼저 1960년 8 월 15 일 종전 신 천환권의 도안을 세종대왕으로 변경한 개 천환권을 발행하였고 이어 1961년 4 월 19일에는 역시 세종대왕을 도안으로 한 개 오백환권을 발행하였다.
개 천환권 1960.8.15
개 오백환권 1961.4.19
개 갑백한권 1962.5.16

또한 1962년 5월 16일에는 개 백환권의 도안을 변경한 개갑(改甲) 백환권을 발행하였다. 개갑 백환권은 당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을 위한 국민 저축심 앙양을 위하여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상을 도안으로 채택하였으며, 전후 양면 모두 한자 사용없이 순수한 한글만으로 표기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개갑 백환권은 그해 6 월 10일의 통화개혁으로 발행된지 불과 24일만에 유통 금지됨으로써 한국은행권이 발행된 이래 최단기간 유통된 화폐로 기록되었다.


출처 : 화폐수집 동전과 지폐
글쓴이 : 대전 임꺽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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